중세사회(고려 및 조선)
- 일연(一然, 1206~1289)
- 1206년(희종 2)~1289년(충렬왕 15) 고려후기의 고승, 속성은 김(金).
처음 법명은 견명 (見明), 처음 자는 회연(晦然). 호는 목암(睦庵). 장산(章山:경북 경산) 출신. 아버지는 김언필(金彦弼)이다. 1214년(고종 1) 지금의 광주지방인 해양에 있던 무량사에 가서 학문을 닦았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에서 대웅(大雄)의 문하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1227년 승과의 선불장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그 해 비슬산 보당암에 옮겨 수년간 머무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참선에 몰두하였다. 1236년 10월 몽고의 침입을 받아 병호가 이르자 문수의 오자주(五字呪)를 염송하면서 감응을 빌었다. 이 때 문득 문수가 현신하여 “무주에 있으라' 하는 계시를 받고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기서 “생계불멸(生界不滅) 불계부증(佛界不增)” 의 화두를 탐구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 해 삼중대사(三重大師)로 승진하였고, 1246년 다시 선사(禪師)에 올랐다. 1249년 정안의 청을 받고 남해의 정림사로 옮겨 대장경 주조 중 남해분사대장도감의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 윤산(輪山) 길상암(吉祥蓭)에 머무르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를 지었고 , 1259년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제수받았다. 1261년(원종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에 가서 선월사(禪月社)에 주석하였다. 이 때 이장용 등과 교유하였으며, 지눌을 계승하였다고 선언하였다. 1264년 가을 영일의 운제산 오어사로 내려갔다. 이 때 비슬산 인홍사(仁弘社)의 주법 만회가 초청하자 인홍사로 가서 후에 초청하여 해운사에서 대장낙성회향법회를 베풀었는데 일연으로 하여금 그 법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의 물 흐르는 듯한 강론과 설법은 그곳에 모인사람들을 감화시켰다. 1274년 인홍사를 중수하고 사액을 받아 인흥사(仁興社)로 고쳤다. 이 때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수하고 불일사로 고쳤다. 1277년(충렬왕 3)부터 충렬왕의 명에 따라 청도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크게 진작하였다. 1281년 동정군(東征軍)의 격려차 경주에 내려온 충렬왕을 수행하였다. 1282년 개성으로 올라가 광명사에서 주석하면서 왕실의 극진한 귀의를 받았다. 이듬해 3월 국존(國尊)에 책봉되어 원경충조(圓徑冲照)의 호를 받았다. 그러나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왕의 만류를 뿌리치고 하산하였다. 어머니가 죽던 해인 1284년 인각사를 수리하고 인각사에서 2차에 걸쳐 구산문도회를 개최하였다. 1289년 7월 제자들과 선문답을 나눈 뒤 금강인을 맺고 입적하였다. 그 해 10월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며, 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混丘)가 있다. 저술로는 『 조파도 』 2권, 『 대장수지록 』 3권, 『 선문염송사원 』 30권, 『 중편조동오위 』 2권, 『 어록 』 2권, 『 게송잡저 』 3권, 『 재승법수 』 7권, 『 조정사원 』 30권, 『 삼국유사 』 5권, 『 역대연표 』 등 100여 권이 있으나 『 중편조동오위 』 2권, 『 삼국유사 』 5권, 『 역대연표 』 등 3종의 저술만 현존하고 있다.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 세종(世宗) 21년(1420)~성종 19년(1488).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또는 정정정(亭亭亭). 호조전서 의(義)의 증손으로 목사 미성(彌性)의 아들, 권근의 외손이다. 조수(趙修) ․ 류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다. 학문의 폭이 넓어 천문·지리 ·의약·성명·풍수까지 겸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재감 직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집현전 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부수찬으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 부교리에 올랐다. 다음해 수양대군을 따라 명에 종사관으로 다녀왔으며,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로 옮겼다. 145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우사간·지제교에 초수(超受)되었다. 1458년 정시에서 우등하여 공조참의에 올랐다가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 오행총괄 (五行總括) 』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을 만나 시재(詩才)를 겨루었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1465년 예문관 제학·중추동지부사를 거쳐 다음해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예조참판이 되고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使)에 특가(特加) 되었으며, 『 경국대전 』 편찬에 참가하였다 . 1467년 형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성균지사를 겸하여 문형을 관장하였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1) 좌참관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郡)에 봉해졌다. 1467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하였는데 수창(酬唱)을 잘하여 기재라는 칭송을 받았다. 같은 해 우참찬에 오르고 [삼국사절요]를 공편하였다. 1477년 다시 달성군에 봉해지고 도총관을 겸하였다. 다음해 대제학을 겸직하였고, 곧이어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이해 『 동문선 』 130권을 찬집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제(宋制)에 의거하여 문과의 관시(館試) · 한성시(漢城試) · 향시(鄕試)에서 일곱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배웠다. 1480년 『 오자 』 를 주석하고 『 역대연표 』 를 찬진하였다 . 1481년 『 신찬동국여지승람 』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으며 이해 『 동국통감 』 57권을 완성하였다. 1486년 『 필원잡기 』 를 저술하고, 1488년 사망하였다. 여섯 왕을 섬겨 23년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 사가집 』 『 역대연표 』 『 동인시화 』『 태평한화골계전 』『 필원잡기 』『 동인시문 』 등이 있고 , 공동찬집으로 『 동문선 』『 동국통감 』『 동국여지승람 』『 경국대전 』『 연주시격언해 』 가 있다.
조선 초기 문병(文柄)을 잡았던 핵심적 관료학자의 한 사람으로 그의 학풍은 15세기 관학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 김굉필(金宏弼, 1454~1504)
- 1454년(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전기의 학자.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 그의 선조는 서흥의 토성으로 고려후기 사족으로 성장하였는데 증조부인 사곤(士坤)이 수령과 청환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게 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그의 조부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 개국공신 조반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었는데,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하였다고 한다. 성장함에 따라 분발하여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주로 영남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 『 처의가 』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 때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 소학 』 을 배웠다. 평생토록 『 소학 』 을 독신 (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하여 『 소학 』 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하였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 때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 승려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에 의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참봉· 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연산군 2) 군자감 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량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으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과 원방부처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후 순천에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 피화(被禍)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자에 힘입은 바 크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신용개·김전 등에 의하여 학문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도학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을 비롯한 반대세력에 의하여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 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가 계속되어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의 학문적 성향은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다. [소학]에 입각한 그의 처신(處身) · 복상(服喪) · 솔가(率家)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家範)' 이라 하여 숭상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희천의 상현서원·서흥의 화곡서원·순천의 옥천서원·현풍의 도동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 한훤당집 』 『 가범 』 등이 있다 .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곽율(1531~2593)
- 1531년(중종 26)~1593년(선조 23).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현풍.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조식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13)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72년 천거로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자원하여 김천찰방으로 전직되었다가, 내섬시직장·송라도찰방을 역임하고 1585년 학행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특진되었다. 이어 홍산현감 · 군자감판관을 거쳐 예천군수로 있던 중 파직되었다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 김성일에 의해 초계군의 임시수령으로 기용되어 왜군과 싸웠으며 곧 예빈사(禮賓社) 부정(副正)으로 기용되었으나 유생 정유명 등의 유임상소에 의해 초계군수로 유임되어 강우(江右)지역의 보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학문을 즐겼고 사람됨이 순정하여 가는 곳마다 학풍을 일으켰으며 찰방으로 있을 때는 풍속을 순화하였다. 도동서원 별사에 제향되었다.
- 곽재우(郭再祐, 1522~1617)
- 1552년(명종 7)~1617년(광해군 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현풍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忘憂)당(堂). 의령출신으로 황해도관찰사 월(越)의 아들이고,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김우옹과는 동서사이다. 1585년(선조18) 별시의 정시(庭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지은 글이 왕의 듯에 거슬려서 발표한지 수 일 만에 전방(全榜)을 파하여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듯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 위 둔지(遯地)에 강사(江舍)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 해 7월 유곡찰방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량에 제수되었고, 10월에는 절충장군으로 승진하여 조방장(助防將)을 겸하였으며, 이듬해 12월에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였으며,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현풍(玄風)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과 일본 간에 진행되었던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하였으나 그 역을 마치기 전에 왜군이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 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복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 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고, 그 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부임하였다. 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 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 남쪽 창암진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었고,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마저 사퇴하였다. 곧 안동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 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고군에 제수되었고, 다음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에 승진하였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을 역임하였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다시 경상좌도병마사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였다. 1616년 장례원판결사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이듬해 죽었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에 의령의 정암진과 세간리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를 작전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이라 하여 적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을 구사하여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하거나 유인하여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펼쳐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수 십 명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명에 이르는 큰 병력으로 늘어나 그 병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하였고 그들의 진로를 차단하여 왜군이 계획한 호남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송하는 적선을 기습하여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현풍·창녕·영상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그 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1차 진주성싸움에 휘하의 의병을 보내어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하여 적의 접근을 막았다. 묘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죽은 뒤에 그의 사우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겸지의 금부로 추증되었다. 저서로 『 망우당집 (忘憂堂集) 』이 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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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2023-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