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회
- 서상돈(徐相燉, 1851~1913)
- 1851년 상주에서 출생한 서상돈은 1859년 양친을 따라 대구로 이주하였다. 대구에 정착한 서상돈은 이후 지물상과 포목상을 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고, 이렇게 모은 재산을 토지에 투자하여 3만석지기의 대지주가 되었다. 그는 1902년에는 대구전보국사장(大邱電報局司長) 조중은(趙重恩)과 더불어 양잠회사를 설립하여 칠곡 문수면에
뽕나무 2만 1천 주를 심기도 하였다.이렇게 모은 부를 바탕으로 서상돈은 1903년 일종의 조세수취업자인 내장원 경상남북도 검세관(檢稅官) 이 되었다. 서상돈은 각 군(郡)에 고용인을 보내 혹독하게 조세를 징수하고, 그 자금으로 미곡과 지물 등 각종 물품을 사고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1904년 고용인들이 조세로 거두어들인 공전(公錢)을 유용하여 그
상납(上納)을 지체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해임되고 조사까지 받게 되었다.검세 관직에서 해임된 후 창고업·대부업 등으로 부를 축적하여 대구의 갑부로 성장한 서상돈은 계몽운동을 비롯한 지역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906년 대구광문사(大邱廣問社)가 만들어지자 서상돈은 부사장으로 취임하여 재정적인 뒷받침을 맡았다.
러일전쟁 이후 경부철도를 중심으로 일본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상권을 확대해 나가는 가운데, 대구에도 많은 일본 상인들이 진출, 한국 상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 대구의 상인들과 시민들은 후에 대구상업회의소로 발전하는 대구시의소(大邱市議所)를 조직하여 일본의 상권침탈에 대응하였는데, 서상돈은 이 대구시의소 초대 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일본인 야기(八木松太郞)와 공동사업으로 부식원(富植園)을 설립하여 각종 수목을 재배하였으며, 일제가 화폐정리사업 이후 농촌금융을 장악하기 위해 설립한 대구농공은행에 1,090주를 출자하기도 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는 광문사문회(廣問社文會)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열었고, 회의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이었던 서상돈은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제 1,300만 환율 보상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이 운동은 ‘상충상의(尙忠尙義)'를 표방하면서 월남·이집트·화란 등의 나라와 같이 망하지 않기 위해 국채를 갚아야 하고, 이를 위해 금주(禁酒)와 금연(禁煙)으로 모금을 하자는 것이었다. 곧 ‘경상북도대구군금연상채회(慶尙北道大邱郡禁煙償債會)'를 설립되었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민의소(民義所)를 만들어 이 운동을 일반 국민에게까지 확산시켰다. 임원진이 구성될 때 서상돈은 ‘담보금을 납입한 사람들에게 영수증을 만들어주고 은행적립통장을 관리' 하는 재무직을 맡았다.
대구에서 조직적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 · [대한매일신보] · [제국신문] 등을 비롯한 민족 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통일된 조직체계를 갖지 못하고, 일제의 방해와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끝낸 좌절되고 말았다.
한편, 서상돈은 1907년 5월 전군수 정재학, 전참봉 서돈순(徐敦淳), 전주사 윤필오(尹弼五) 등과 더불어 6,700여 환의 자금을 마련하여 관찰사 이충구(李忠求)의 도움으로 대구군 동서(東西) 청사(廳舍) 자리를 얻어 협성학교(協成學校)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서상돈은 천주교 신자로서 천주교 대구교구의 발전과 전교활동(傳敎活動)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1898년 준공된 한국식 십자형 성당의 건립과 이것이 소실된 후 1903년 축성한 대구대성당(현 계산 성당의 원형)의 건립에 앞장섰다. 또한 1911년 6월 2일 대구교구가 새롭게 설립되어 안주교(安主敎)가 부임하자 서상돈은 자기가 경영하던 앞고개 종묘원(種苗園) 만여 평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교구관리소를 신축할 수 있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또한 서상돈은 부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매년 봄·가을로 양곡 수 백석을 내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신도들을 입교(入敎)시켰다.
가톨릭 신자로, 대구 상업계의 지도자로, 가난한 사람의 자부(慈父)로 살아 온 서상돈은 1913년 6월 30일 향년 63세로 사망하였다.
- 서상일(徐相日, 1886~1962)
- 한말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대구의 대표적 민족운동가·정치가로 활동한 서상일은 1866년 대구 달성에서 출생했다. 서상일은 어려서 한문사숙과 대구공립소학교를 차례로 졸업하고 달성학교에 진학하여 보통과와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그 직후 탁지부 측량과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가 측량기수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1907년 보성법률전문학교에 입학, 1910년 졸업하였다.
보성법률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09년 서상일은 대구를 중심으로 신교육을 받은 청년지식인들로 구성된 달성친목회(達成親睦會)에 참여하였고,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와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도 참여하였다.
1915년 경남북의 지주와 상인자본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가 결성되자 서상일은 외교부장으로 추대되었다. 중앙총회는 이전의 계몽운동적 성격을 계승하였으며, 독립운동 자금모집과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펼치고자 하였다. 한편 서상일은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1914년 달성의
거부 윤상태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태궁상회(太弓商會)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 태궁상회는 안희제가 경영하던 백산상회의 대구연락사무소 역할을 동시에 행했다.1919년 4월 서상일은 상해임시정부의 선포문과 강령 각 10매를 문상직(文相直)으로부터 전해받는 등 독립운동 자금 조달 및 국외에서의 통신 연락 활동을 펼쳤다. 그즈음 그는 독립의군부에서 자금 모집원으로 파견된 정운해를 마산의 부호 서상호에게 연결시켜 주었고, 이러한 활동으로 내란죄로 검거 투옥되었다가 1920년 초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서상일은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에 나섰다. 1921년 조선인과 일본인의 합작으로 설립한 대구곡물신탁주식회사에 참여하여 이사로 선임되었고, 1923년 7월경에는 서병조·한익동·장직상 등 대구지역의 대표적 지주와 자본가들과 함께 대구구락부를 결성하였다 .
1920년대 중반부터 최린·김성수·송진우 등이 중심이 되어 타협적인 자치운동을 벌일 때 서상일도 여기에 참여하게 된다. 타협적인 자치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 서상일은 즉각적인 독립운동을 포기하게 되었고, 대구지역에서의 활동도 개량적인 수준에 머물게 된다.
서상일은 일제 말기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을 맡고, 조선인 청년학생에게 학병을 권유하는 강연을 행하는 등 친일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직후인 8월 17일 서상일은 경북지역의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한 경북치안유지회 결성을 주도하고 대표로 선출되었다. 얼마 후 경북치안유지회는 좌익의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와 통합하여 건국준비 경북지부와 통합하여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로 바뀌었다.
이즈음 서상일은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8인 총무' 로 선출되었고, 미군정청 경제고문단으로 발탁되면서 미군정과도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같은 관계를 바탕으로 그는 비상국민회의 의원, 남조선과도입법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이승만 한민당이 주도한 남한 단독정부수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가 실시되자 서상일은 대구 을구(乙區)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 후 한민당이 이승만과의 결별하고 민주국민당을 결성할 때 서상일은 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50년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서상일은 이승만의 강력한 견제를 받아 승려 출신 박성하에게 46표 차이로 패배하기도 하였다.
1954년 11월 ‘4사5입 개헌'으로 ‘종신대통령제'가 이루어지자 서상일은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이승만 독재 반대와 야당 통합운동을 벌여나갔다. 조봉암의 참여문제로 통합운동이 양분되자 그는 조봉암의 참여를 찬성하는 ‘민주대동파'에 합류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진보당(가칭)추진위원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총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제3대 대통령선거(1956.3.30) 이후 진보당추진위원회 내부에서 당 결성시기를 두고 서상일과 조봉암계가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서상일은 23명의 중앙 상무위원과 함께 1957년 ‘민주혁신당'을 결성하였다. 서상일이 간 사장으로 있던 ‘민주혁신당'은 의원내각제로의 개헌과 UN 감시 하 자유총선거를 주요 정책으로 표방하였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 서상일을 비롯한 혁신세력들은 7·29선거에 대비해 혁신세력을 통합하는 운동을 벌여 ‘사회대중당'을 발기하였다. 7·29선거에서 혁신세력이 참패한 가운데 그는 사회대중당 후보로 대구 을구에 출마하여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선거 후 민주혁신당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사회당'을 결성(1960.10)하였다.
서상일은 그 후 1961년 1월 비진보당계와 연합하여 국민대중과 혁신우과(사회민주주의 우파) 정당임을 표방하여 통일사회당을 결성하고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61년 5·16쿠데타가 발생하자 서상일은 ‘중앙통일사회당 사건'으로 군사혁명재판소에 기소되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 때 그는 지병으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한 상태였으며,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62년 4월18일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 이상화(李相和, 1901~1943)
- 투철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저항시의 참다운 면모를 보였던 대구 출신 시인 이상화 (李相和)는 초기에 관능과 퇴폐, ‘경향파' 에로의 경도 등의 과도기적 증후를 보이기도 했지만 중기 이후 ‘민족의식' 이라는 뜨거운 용광로 안에서 치열하게 정신을 달구었던 시인이다. 그는 이 민족의 새벽을 꿈꾸는가 하면, 좌절된 민족이나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조국의 해방을 갈구하는 목소리로 격조 높은 시를 빚어 우리 문학사(文學史)의 빛나는 자리에 올랐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이르러서는 빼앗겼던 이 땅에서 소생의 봄을 뜨겁게 노래함으로써 그를 민족시인으로 우뚝 서게 했다. 1926년 『 개벽 』 에 발표한 이 시는 우리의 국토, 우리의 자연에 대해 예찬하면서 토속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저항의식을 부드럽게 심화했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라는 현실적 상황을 명확하게 떠올리면서도 ‘봄'이라는 계절이 갖는 의미[희망]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자신의 의식을 자연이라는 생명적 현상에 이입·이행시켜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를 내고, 평면적인 회고조나 계몽성을 뛰어넘었다.
이상화의 초기 시에는 밀폐성·침체성·어둠의식 등이 두드러지고 ‘죽음' 이나 '부활 이미지' 가 두드러졌지만, 중기 이후에는 식민지적 현실인식에서 나온 죽음도 반드시 삶을 전제로 하는 등 ‘삶의 의지' 가 강렬한 빛깔로 떠올랐다. 또한 주로 민족이나 국가를 시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세련된 언어 속에 사회와 현실에 대한 준열한 의식을 다져 넣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 이장희(李章熙, 1900~1929)
- 우 리나라 초창기 시단에 섬광처럼 번득이다 요절한 대구 출신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 1900~1929)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직관, 탁월한 감각적 이미지의 형상화 등으로 우리 문학사에 ‘감각시' 의 새 지평을 연 빼어난 시인이었다.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그것도 자아의 늪에 자폐된 스스로 죽음을 선택[음독자살]한 그의 불우한 생애는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함축돼 있는 ‘한 편의 서정시' 처럼 애달프다.
결벽증 (潔癖症)과 자의식(自意識)이 강했던 그의 예술지상주의·상징주의에 탐닉, 모더니즘의 기법을 일구었다. 그의 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고양이' 는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상징물로, 때로는 묘사의 감각적 대상으로 떠올랐다. [봄은 고양이로다]의 경우, 고양이가 감각적인 경이감을 자아내는 대상으로 나타나며, ‘봄을 고양이 속에' “고양이를 봄 속에' 융합시키는 독특한 발상법이 돋보인다. 치밀한 관찰과 예리한 분석력으로 사물[고양이]을 관조, 감각의 아름다움을 떠올려주는 이 시는 고양이의 털·눈·입술·수염을 통해 봄의 향기[감촉], 불길[정념], 졸음[권태], 생기[소생]를 묘사한다. 또한 ‘봄' 을 ‘고운' · '미친' · '포근한' · '푸른' 등으로 수식하는가 하면, 그 ‘봄' 을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 · '호동그란 눈' · '다물은 입술' · '쭉 뻗은 수염' 과 짝을 이루게 해 신선한 감각적 이미지를 빚는다. 색채어가 자주 등장하고, 독백체 문장이 두드러지기도 하는 그의 시는 ‘심정적인 관념시' 를 1930년대의 ‘모더니즘의 감각시' 로 연결시키는 성과도 기록했다.
- 이육사(李陸史, 1904~1944)
- 강렬한 저항정신에 불을 지피면서 민족적 의지를 장엄하게 노래하는 한편 향토색 짙은 서정시로 우리 고유의 정서를 길어 올렸던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는 안동이 낳은 준열한 시인으로 대구에 머문 적이 있다. 일제 식민지시기의 민족적 비운을 정면 돌파한 그는 마침내는 죽음으로 저항한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1930년 조선일보에 시(詩) 「 말 」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저항정신, 초인 의지, 민족 해방의 염원 등을 집중적으로 노래했던 그의 시에는 강렬한 의지의 언어, 조국 강토와 자연에 대한 향수와 동경이 두드러지고, 망국한의 비애가 우렁찬 목소리 속에 꿈틀거리고 있기도 하다. 「 절정 」 등에는 가열한 저항정신이, 「 청포도 」등에는 실향(失鄕)의식과 그 비애가, 「 광야 」 등 후기 작품에는 초인의지와 그 염원이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실향(失鄕)의식과 그 비애를 향토색 짙은 서정적 시풍으로 노래한 「 청포도 」는 민족 고유의 정서를 아름답게 떠올린다. 상징성을 거느리면서 세련된 언어감각으로 짜여져 있어, 이념적인 시(詩) 뿐 아니라 자신이 살던 시대의 척박한 삶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섬세하게 형상화하는 데도 빼어났음을 확인케한다.
‘흰 돛단배' 나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 은 잃어버린 조국을 찾아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지사들의 표징이라 할 수 있으며, ‘하이얀 모시 수건' 과 같은 표현에서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에 천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청포도 」는 또한 ‘청포도' ·‘청포' ·‘흰 돛' ·‘푸른 바다'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 등에서 나타나듯 색깔을 떠올리는 어휘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며, 이 같은 감각적 어휘들은 그의 다른 시에서 잘 보이지 않는 ‘신선한 이미지' 를 만들고 있다.
- 박목월(朴木月, 1916~1978)
- ‘청노루' 같은 나그네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박목월(朴木月, 1916~1978) 은 ‘청록파' 시인 중의 한 사람이며, 경주에서 태어났다. 신라 고도가 지니고 있는 정서를 밀도 높게 그려 보인 그의 시는 ‘북(北)에는 소월(素月), 남에는 목월(木月)' 이라는 찬사를 낳을 정도로 ‘서정성' 이 빼어났다.
자연에서 출발, 생활인 시절을 거쳐 죽음에 대한 달관에 이르는 시적(詩的) 여정을 보여준 목월은 극도의 언어 절제와 자연 풍경을 윤색 없이 포착하는 미덕을 한국시사(韓國詩史)에 기록했으며, 향토적인 서정을 바탕에 깔고 부단한 변모를 시도했었다.
초기의 『 청록집 』·『 산도화 』 등에서는 ‘자연' 을 노래하고 향토적 정서를 길어 올리면서 이미지즘과 민요적 율격, 토속적 서정이 특징을 이룬 시들을 보여줬다. 그러나 중기의 『 난 (蘭) · 기타 』 ·『 청담 』에서는 현실세계로 다가섰고, 토속성이 현대감각으로 탈바꿈하는 변모를 보였다. 또한 후기에는 자연회귀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졌으며, 경상도 사투리 구사로 독특한 정감을 빚고 구원의 세계에 이르는 ‘승화의 체념' 들을 형상화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애송되는 「 나그네 」는 조지훈의 시 「 완화삼 」에 화답한 작품으로 토속적인 정취가 물씬 풍긴다. 민요적인 가락과 극도로 절제된 언어를 통해 순연한 자유인의 여심을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떠올린다. 그런가 하면, 그의 시에 포착되는 자연의 모습은 외관적으로 보이는 인간과 자연의 대상들이 아무런 균열 없이 조화를 이루는 자연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 조지훈(趙芝薰, 1920~1969)
- 지조와 저항의 시인 조지훈(趙芝薰, 1920~1969)은 영양 출신으로 한국의 전통의식과 민족의식을 서정적으로 노래했다. 그는 학자·논객으로서도 일세를 풍미했지만, 이미지를 아끼고 우리 시의 전통적 운율을 절묘하게 구사함으로써 주목됐다.
그의 「봉황수」는 봉황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주체와 객체를 교체시켜 하늘 끝까지 울려 퍼질 수 있는 울음을 겨우 참고있는 시인의 슬픔을 드러낸다. 열정과 충동을 함축하면서 되풀이되는 질서인 운율을 의지와 절제의 언어로 빚었던 이 데뷔작은 겉보기에는 줄글로 돼 있으나 3음보의 운율을 거느리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소리 조직도 대립의 효과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으며, 그 내용도 빛에서 소리로, 다시 소리에서 빛으로 전개된다. 이 시에는 조선시기에 주권을 행사한 주체자들과 식민지시기의 지식인을 대비, 피지배자의 시대적 고통과 비장감을 표출돼 있으며, 궁전 건축미의 몇 가지 요체를 예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939년 『문장』의 추천 작품인「고풍의상」은 한국의 고전적 생활문화에 담긴 여성적 품위를 의상의 아름다움과 결합시켜 극대화했다. 역시 추천작인「승무」는 젊은 승려의 현세적 삶의 고뇌를 거쳐 불교의 깊은 세계에 이르러는 정신미를 춤의 배경, 춤사위, 승복의 나부낌을 통해 뛰어난 감수성으로 그리고 있다.
『 풀잎 단장 』· 『 역사 앞에서 』· 『 여운 』 등의 시집을 통해서는 민족의 수난과 시대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지력을 노래하는가 하면, 저항의식을 비극적 인식으로 간접화하는 작품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시 「 다부원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시화(詩化)한 것으로 참전시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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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2023-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