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그윽한 국화 향기와 갖가지 화훼를 비롯한 분재, 관목류 등이 즐비하게 전시된 불로동 단지를 지나 경부 고속도로를 지나기 전 우측에 고분군 안내 표시판이 보인다.
안내판을 따라 주택가 골목으로 400m쯤 올라가면 299,746㎡(90,673평)의 광활한 산 일대에 걸쳐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 제 262호로 1978년 6월 23일 경남 김해 예안리 고분과 함께 가장 일찍 지정된 불로동 고분군이 있다.
입구의 잘 정비된 봉분 몇 기를 지나 50여m쯤 산책로를 따라 언덕 위에 올라서면 웅장하고 위엄서린 경주의 왕릉과는 또 다른 이색적인 느낌이 드는 대·소고분이 나타난다.
탁 트인 능성따라 고분군이 산 봉우리로 착각이 들 정도로 볼록볼록 솟아있다.
이 고분군은 팔공산의 지맥이 길게 뻗어 내려와 경부 고속도로에 의해 잘리운 일대의 능선으로 볼로동 및 봉무동, 도동의 구릉에 분포하여 있는 봉토분으로 현재 211기의 고분이 밀집되있다.
불로동 고분군은 1938년 고분 2기를 조사하여 \'해안면 고분\'으로 불리워졌다. 그 뒤 1963년 12월과 이듬해 1월 두차례에 걸쳐 경북대박물관 발굴 조사에서 2기를 추가 조사한 뒤, 해안면 고분을 포함하여 '대구 불로동 고분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해안면 1호분의 경우 벽면의 축조에는 산석(山石)을 이용하였으며 바닥은 생토 위에 모래를 갈고 그 위에 바로 시신을 올려놓은 듯하며 부장품으로는 토기류와 금동제의 운주편(運柱片)이 출토되었다.
대체적으로 학술적 발굴 조사에 의하면 내부구조는 냇돌 또는 깬돌로 4벽을 쌓고 판석으로 덮은 직사각형의 수혈식석곽분(竪穴式石槨墳 : 구덩식 돌방무덤)으로 밝혀졌으며, 금제 혹은 금동제 장신구와 철도끼, 철제꺽쇠, 마구류 그리고 무늬가 새겨진 토기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군은 대개 4-5세기경의 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고분의 직경은 15-20m 높이 4m 내외의 봉분으로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토착지배세력의 집단 묘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로동 고분군은 대구 일대에 현존하는 고분군 중 가장 외형적인 형태가 잘 갖추어져 있다.
이를 통해 겉모양이나마 고대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으며, 대구 분지의 옛모습과 낙동강 동쪽 연안의 석곽분군(石槨墳群)으로 원분포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유적으로서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1979년에 보수·정화되었으며 시가지의 급격한 팽창과 무분별한 훼손으로 원형을 잃어가고 있자 금년 대구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수차례에 걸쳐 둘러보고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시비 40,000천원을 지원받아 안내간판 및 보호철책을 새로이 단장하고 공공근로사업을 통해 아카시아 집단서식지구 정비와 봉분 잔디 입히기, 산책로(2.9km) 개선 등 연인원 4,260여명을 동원 고분군 정비와 보존에 많은 정열을 쏟고 있다.
자가용
대구공항에서 팔공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좌우에 가득한 화원을 지나 도동측백수림 입구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다리를 건너면 복잡한 동네와 시장이 나오는데 시장을 조금지나 가다보면,
오른쪽에 작은 안내판이 길에 걸려있는데, 불로동 고분군 오른쪽 좁은 골목길을 약 100m쯤 들어가면 됩니다.